- 뉴스더보이스/ 승인 2025.04.21 06:13

올해처럼 겨울이 길었던 적은 없다. 무슨 조화인지 4월 중순까지 서울에서 설경을 지켜봐야 했다. 아직 일교차가 크긴 하지만 낮 동안의 일조량은 충분하다. 산 여기저기 꽃들이 만개했으니까. 눈이 부시게.
봄은 소생의 계절이다. 희망의 또 다른 말로 쓰이는 이유도 그것이다. T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역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는’ 죽음을 통한 재생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아빠, 이건 죽었다고. 분명해.”
몇 해 전 옥상 텃밭을 가꿀 때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큰 아이가 코를 씰룩이며 말했다. 겨울이 지나고 옥탑방 앞에 놓인 배불뚝이 항아리에 봄볕이 내리쪼일 즈음이었다. 난 겨우내 옥상 창고에 넣어두었던 화분을 꺼내고 꽁꽁 싸두었던 검정 비닐봉투를 벗겨냈다.
화분 속 주인공은 한 묶음의 대파였다. 파란 줄기는 누렇게 떴고 흰 줄기는 허옇게 말라있었다. 누가 봐도 동사(凍死)한 게 분명했다.
“아빠, 다른 거 심으려고?”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아이의 머리를 잘 익은 홍시 다루듯 쓰다듬었다.
“피이, 이미 죽어버린 걸 무슨 수로…….”
녀석은 꽤 논리적으로 나를 공박했다. 나에게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2003년 겨울이었다. 어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져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절망에 빠졌다. 부친도 와병 중인데다 실제로 집안에서 기둥 역할을 해온 사람이 어머니였다. 누구는 장례식장을 알아보자고 했고 누구는 실의에 잠겨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집에서 막내였던 난 당시 국내 기업의 50년사를 집필해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난 후 하던 일을 접고 병간호에 매달렸다. 어머니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그해 겨울엔 고속도로가 폭설로 난리가 났다. 난 그걸 병실에서 우두커니 뉴스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엔 온통 어머니 생각뿐이었다. 어머니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 말이다.
난 김치냉장고에서 어머니가 담아놓은 동치미를 꺼냈고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대보름 나물을 들기름으로 볶아냈다. 그걸 밍밍한 병원 밥상에 올렸다. 어머니는 조금씩 입맛을 찾아갔고 그렇게 봄이 왔다. 병실을 형님에게 맡기고 집에 잠시 들렀다. 부친의 식사를 챙겨드리고 옥상에 올라갔다. 거기엔 어머니가 평소 돌보던 텃밭이 있었다. 그때 눈에 띈 것이 검은 비닐봉지로 여물게 동여맨 화분이었다. 난 양지바른 곳에 그걸 옮겨놓았다. 비닐봉지를 벗겼다. 어머니처럼 하얗게 세어버린 대파 몇 뿌리가 여윈 몸을 드러냈다.
‘뭐 하러 이걸 비닐봉지로 싸놓으셨담?’
난 혀끝을 찼다. 하지만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어머니의 공(功)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날은 점점 따뜻해졌다. 어머니도 점차 기력을 찾아갔다. 뇌수술 탓에 약간의 치매기가 있었지만 중환자실에서 눈도 뜨지 못하던 때와 비교하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담당 의사는 “할머니가 이렇게 퇴원하실 줄은 몰랐어요. 집에서도 운동을 꾸준히 하셔야 합니다”라고 조언했다.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옥상에서 봄볕을 쬐고 싶다고 했다. 난 어머니를 업고 옥상까지 올라갔다. 휠체어도 가져갔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앉혀 드렸다. 어머니가 봄볕에 눈이 부신 듯 손바닥을 눈썹 근처에 바투 댔다. 옥상 텃밭을 둘러보던 어머니가 갑자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수북이 올라온 잡초들 사이로 한 곳에 눈을 고정시켰다. 바로 대파였다. 안 보는 사이 대파는 비쩍 마른 외피를 뚫고 연둣빛 생명을 틔워내고 있었다.

“다 지지금 명(命)이 있는 기라. 지 명을 냄기놓고 가는 벱은 읎다아.”
어머니가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난 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는 그날 이후 훨씬 좋아지셨다. 10년 넘게 더 사시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보셨고 손주 둘까지 안아보시고 가셨다.
“대파는 겨우내 얼지만 않으면 다시 살아난단다.”
난 첫째 아이에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양 소곤거렸다.
그해 봄, 우린 죽은 줄 알았던 대파가 되살아나 저녁 식탁 위 된장찌개에 들어가는 것을 함께 보았다. 아이는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 옥상 텃밭에 함께 물 주러 가요.”
희망은 대파처럼, 또 봄처럼 그렇게 윤회(輪回)한다. 나와 아이는 그걸 지켜보았다. 아마 올해도 그럴 것이다.

홍대업
<작가 약력>
-前 데일리팜 기자(2005∽2009년)
-前 약사공론 기자(2009∽2019년)
-소방청 동화공모전 은상 수상(2020년)
-국립생태원 동화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년)
http://www.newsthevoice.com/news/articleView.html?idxno=4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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